짧게 회의하는 법

조직과 업종을 막론하고 모든 직장인의 증오를 받는 적을 몇 개 꼽을 수 있을 거다. 눈치봐야 하는 퇴근, 존중받지 못하는 개인 일정 등등. 그중에서도 의미는 없고 시간만 길게 잡아먹는 잦은 회의는 모두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Shorter the better

여기서 앞서 선언하자면, 나는 짧은회의제일주의자다. 회의의 내용과 형식을 막론하고 50분 이상으로 길어지는 회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할 얘기가 끝나면 미리 잡아둔 시간이 30분, 40분, 혹은 50분이더라도 10분, 20분, 30분만에 회의를 끝내는 편을 선호한다. 모든 회의는 빨리 끝내기 위해 최대한 후다닥 진행한다. 오늘은 짧은회의제일주의자의 입장에서 왜 짧은 회의가 좋은 회의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짧은 회의라는 이상적인 목표에 모두가 다다를 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한다.


왜 짧은 회의가 좋은가

첫번째 이유는 명확하다. 길게 늘어지면 모두의 집중력도 흩어진다. 생각보다 30분 이상 한 주제에 대해 집중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특히 재택과 원격근무가 활성화되고 있는 시대에, 화상회의로 30분 이상을 집중하는 건 업무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늘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상태의 30분은 정말로 피곤하다.)

두번째 이유. 모두의 소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회의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회의당 소모하는 우리의 리소스도 크다. 예를 들어, 200여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에서 전사회의의/All-hands-on-deck을 30분만 해도 6,000분 분량의 리소스가 타버리는 셈이다. 그러니 각자의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짧은 회의는 필수다.

세번째 이유. 짧게 회의를 끝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진 상태의 회의는 빠른 피드백과 빠른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시간은 무제한 or 여유롭게 있으니 느긋하게 얘기해보죠, 같은 스탠스로는 점진적인 의견과 돌려말하기가 자연스럽게 통용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아이디어나 결론에 도달하고 모두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훨씬 직접적인 방식의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다급함(다만 너무 참여 인원을 채찍질하진 않는 조급함)은 꼭 필요하다.

사족. 물론 특정한 이유와 배경을 가진 회의는 당연하게도 길어질 수 있고, 길어져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스 브레이킹을 곁들인 킥오프 회의라든지, 워크샵이라든지 등등.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보편적인, 대부분의 회의니까.


짧은 회의를 위한 체크리스트

자, 오늘 모였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같은 한마디로 바로 회의가 짧아지는 건 아니다. 짧은 회의는 결국 회의 주선자가 얼마나 회의를 미리 준비하고, 회의 참여자가 얼마나 그 내용을 미리 인지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짧은 회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역할에 따라 체크리스트화해봤다.

주선자

  1. 일정을 명확히 정했는가? (일시, 장소, 원격회의일 경우 밋/줌 링크)

  2. 회의의 목표를 명확히 정했는가? (우리는 모여서 어떤 주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것인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목표를 위한 어젠다를 문서화하고 공유하였는가?

  4. (가급적) 참여 인원이 열 명 이하인가?

  5. (선택) 모두가 알아야 할 사전 논의 및 맥락이 있는 경우, 이를 정리해 공유하였는가?

참여자

  1. 주선자가 보낸 일정에 명확히 참가 여부를 회신하였는가?

  2. 회의의 목표와 어젠다를 숙지하였는가?

가상의 실무 사례를 들어 위 체크리스트를 적용해보겠다. iOS의 잠금화면을 담당하는 스쿼드에서 iOS 17에 들어갈 잠금화면의 큰그림을 설계하는 미팅을 진행하려 한다고 가정한다.

스쿼드의 PM 혹은 PO는 우선 일정을 확인한다. 슬랙으로 미리 물어봐도 좋고, 구글 캘린더를 확인해 참여해야 할 인원이 모두 가능한 시간을 확인해도 좋다.

일정과 사용 가능한 회의실을 확인한 후엔 캘린더에 해당 일정을 입력한다. 이때, 최대한 상세하게 회의에 대한 정보를 채운다. 특히 구글캘린더는 요즘 쓸모있는 미팅을 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UI가 크고 작은 업데이트를 거치고 있는데, 여기서 제공하는 필드만 잘 채워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정 제목과 참여자, 상세 설명 세 가지 필드에 PM/PO의 명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래는 가상의 사례를 따랐을 때 예시용으로 작성해 본 캘린더다.

회의의 목표를 명확하게 결정하고 주어진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스코프를 한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정한 스코프를 캘린더 제목에 명시한다.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어젠다를 불릿포인트로 내용에 적어주고, 참고해서 미리 읽고 와야 할 것들이 있다면 관련 문서나 내용을 링크로 건다.

특히 여기서 스코프를 한정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끝나지 못할 태산같은 문제를 무작정 잡아두면 논의도 산으로 가기 쉽고 회의의 흐름을 모두가 따라잡기 힘들다. 게다가, 주제의 범위가 넓으면 넓어질수록 참여 인원이 많아지는 것은 필연인데 참여인원이 많을수록 효율적인 피드백과 의견교환은 단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결정한 스코프로 회의를 진행했을 때 만나야 할 사람이 열 명 이하라면 잘 결정한 스코프라고 대체로 판단하고 있다.

이제 PM/PO가 이렇게 캘린더를 보냈다면 이 캘린더를 받은 팀원은 일정을 확인하고 수락 여부를 표시한 후 캘린더의 세부 내용을 반드시 정독한다. 물론, 일정이 바쁘고 미리 회의의 맥락을 캐치하지 못하고 올수도 있는데 이런 참여자가 많을수록 진행자는 미리 정리해둔 내용을 또 다시 공유하는 데에 시간을 써야하기 때문에, 주최자/진행자가 미리 정리해둔 내용을 숙지하는 것은 매너이자 일 잘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본다.

물론 미리 회의 내용을 숙지하는 건 조직 전체에 얼라인된 룰로 자리잡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PM/PO는 이러한 문화가 자리잡고 있지 않은 경우 회의 1-2일 전, 그리고 회의 1시간-30분 전에 구성원들을 리마인드하며 회의 내용 숙지를 독려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짧은 회의 진행하기

자. 그렇다면 체크리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상태에서 회의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회의를 진행해야 정말로 회의가 짧고 간결하고 명료해질 수 있을까? 회의 주최자가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스탠스를 정리해봤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타이머로 제한한다

회의 진행 중에 짧은 아이디에이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상적인 건 필요한 아이디에이션을 각자가 해온 상태지만.) 이 경우 3분 내외로 타이머를 걸고 시간을 준다. 5분. 생각보다 길다. (물론 길이에 대한 건 개인취향이지만, 회의를 진행해봤을 때엔 내겐 늘 5분이 굉장히 길었다.)

긴 환대는 피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모두가 이렇게 모였으니 반갑고, 뭔가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 그것은 착각이고 회의 진행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 요소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제시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 모두 모이셨네요. (아직 안 모인 사람이 있으면 빨리빨리 멘션해서 부른다.) 그럼 기존 잠금화면의 구성목록부터 함께 리뷰하며 여기서 빼고 더할 것을 결정해 보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는다

회의참여자는 각자의 생각이나 제안이 있어도 적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한 경우 이 얘기를 풀어놓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유롭게 말하도록” 시간을 주면 침묵만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모두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참여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며 의견을 묻고, 피드백을 구하자. 회의 주최자는 그저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해 의사결정이 가장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모두의 이야기를 가장 열심히 들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장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는 별도의 회의나 백로그로 분리한다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처음에 생각한 스코프를 넘어서는 문제는 반드시 튀어나온다. 가상의 사례로 생각해보면, 잠금화면의 구성요소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 들어갔으면 하는 특정 컴포넌트를 구현할 수 있는지 다른 스쿼드나 개인에게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럴 때엔 이 이슈를 기록해두고 회의 후에 해당 인원과 커뮤니케이션 한 후 결과를 회의 참여자에게 팔로업으로 공유한다. 혹은, 우리 스쿼드가 생각해봐야 할 다른 문제라면 백로그에 기록해두고 관련한 미팅을 별도로 잡아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주최자의 결정력은 시험대에 오른다. 이걸 지금 얘기할까, 말까? 이건 내가 물어볼까, 말까? 회의 참여자의 스탠스와 에너지에 따라 이 결정을 능숙하게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니어 PM과 시니어 PM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기록한다

회의 내용은 반드시 기록한다. 속기 형태일 필요는 없으니 불릿포인트로 내용을 정리하되, 회의가 끝난 후 별도의 시간을 들이는 게 아니라 회의를 진행하면서 결정된 사항을 바로바로 메모하고 기존 문서가 있다면 기존 문서에 반영한다. (노션 짱! 노션이 아니더라도 실시간 공유만 된다면 모두 짱!) 귀찮음이나 바쁨, 진행의 미숙을 이유로 기록을 빼먹으면 가열차게 논의한 내용이 다 휘발된다.

결론, 혹은 액션아이템을 도출하며 요약한다

회의를 언제 끝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 문장이나 불릿포인트로 정리할 수 있는 결론/액션아이템을 도출했다면 그때 끝내면 된다. 이 내용이 모두와 합의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번씩 이를 읊거나 시각화해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어젠다를 다 소화했으면 즉시 종료한다

남은 시간을 아까워 말라. 30분 회의가 20분만에 종료됐으면 10분은 개인의 리소스로 활용하게 빨리 미팅을 끝내자. 관련해서 더 논의해야 할 사항이 떠오른다면, 또 짧은 미팅을 잡으면 된다.

짧은 회의 후

성공적으로 짧은 회의를 진행했다면 이후 이 회의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한 팔로업을 실천한다. 다음과 같은 액션이 가능하다.

  1. (필수) 도출한 결론을 문서화하고 한 번 더 공유한다.

  2. (필수) 도출한 액션아이템을 협업 툴에 아이템화하고 각 아이템의 담당자를 지정한다. 대략적인 업무 수행 기간도 합의하면 좋다.

  3. (선택) 후속 미팅을 잡는다.

  4. (선택) 다른 조직원에게 확인해봐야 할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고 이를 공유한다.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하기 위해 모든 미팅 참여자가 포함된 슬랙 쓰레드를 하나 파는 게 이상적이다. 여기다 미팅에 관한 자료, 링크, 추가 논의 등을 모두 아카이빙하면 끝. 언제든지 그곳으로 돌아가 필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가볍게 일하기

짧은 회의는 애자일하게 일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기민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재빠르게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회의에 들어가는 리소스는 필연적으로 적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애자일하지 않더라도, 짧은 회의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다. 긴 회의는 긴 업무시간으로 이어지고, 긴 업무시간은 당연하게도 워라밸 파괴로 이어진다. 만족스럽지 않게 일하면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 결국, (과장 조금 보태서) 짧은 회의는 일을 잘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모두가 일잘러가 되길 기원하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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