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직업윤리

프로덕트 매니저, 프로젝트 매니저, 프로덕트 오너 등.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상관은 없다. 이 글은 ‘무어라 불려야할지 알 수 없지만 대략 그러한 역할을 맡고 있는’ 모든 기획자를 위한 현재진행형 고민이다. 기획자에 대한 나의 이해를 이 글에 정리하고 종종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기획자의 정의

기획자는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이다. 그게 무슨 프로젝트고 어떤 일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일의 스케일에 따라 적절한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가급적이면 차질이 없도록 상황을 꾸준히 살핀다. 무언가 막힌 구석이 있다면 이를 스스로 해결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을 끌어온다. 막연히 기획자란 일에 대해 상상하면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외향적이다. 마당발이다.

  • 설득력이 좋다. 카리스마가 있다.

  • 아는 게 많고 잘 할 줄 아는 일이 많다.

하지만 사실은,

  • 외향적일 필요는 없다. 마당발일 필요도 없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만 있으면 된다.

  • 설득력이 좋아야 할 필요도 없다. 카리스마도 내가 뜻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대신, 언제나 명확한 근거와 함께 말하고 일한다. 기획자는 하나의 사안에 대해 수많은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가 없이는 손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 아는 게 많으면 도움은 된다. 하지만 그걸 다 잘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생각해본다. 개발에 대한 지식이 많을수록 프로덕트를 기획할 때에 편하다. 하지만 실제로 개발을 할 줄 알 필요도 없고 이를 위해 시간을 무리하게 쓸 필요도 없다. 전문가의 말을 이해하고 원활히 소통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기획자의 커리어

기획자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 중 하나는 그래서 대체 내 커리어라는 게 있긴 한가, 내가 나아지고는 있나 같은 점이었다. 개발자, 디자이너 같은 직군과 나란히 놓고 스스로를 볼 때마다 이 고민은 깊어지기만 했다.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하면 개발자와 디자이너에게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 남아있는데, 기획자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만든’ (그러니까 ‘구현’한) 결과물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획자에게는 명확히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과물도 없거니와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툴이나 언어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평면적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고민을 하곤 했다. 난 이력서에 대체 뭘 쓰지?

요즘은 이런 것들을 쓰고 있다.

  • 내가 PM으로 참여한 프로젝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요약한다. 작업기간, 작업인원, 목표와 실제로 성취한 결과, 사용한 툴과 주요 개발 언어 등. 일을 되게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한 일은 내가 내린 의사결정 커뮤니케이션, 논의를 진행해간 프로세스 위주로 적는다. 이를 바탕으로 나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 능숙한 업무 관리 툴과 사용경험을 적는다.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든 결국 프로젝트와 리소스를 관리하는 일은 기획자의 숙명이기 때문에.

  • 내가 어떻게 일하고자 하는지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부가정보. 나의 경우에는 이 블로그에 있는 글들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마무리한 프로젝트가 곧 기획자의 커리어 자체다. 슬픈 얘기지만 결과물 없이 마무리한 프로젝트는 확실한 마이너스다. 이런 케이스도 이력서에 빠짐없이 적긴 한다. 다만, 이때는 프로젝트가 결과를 내지 못한 이유를 반드시 부연한다. (문서에 명확하게 적을 수 없다면 인터뷰 과정에서라도 설명한다.)

좋은 기획자란?

첫째. 제네럴리스트

기획 일은 본질적으로 제네럴리스트의 일이다.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꾸준히 일의 면면을 살피면서 아무도 챙기지 않는 부분을 찾아 챙기면서 함께 일하는 스페셜리스트들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서포트한다. 기획자는 리더가 아니다. 하지만 기획자는 특정한 프로젝트의 메인프레임이다. 기획자는 프로젝트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프로젝트를 ‘돌리고’ 있어야 한다.

시니어 기획자는 이렇게 프로젝트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일을 보다 손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니어든 주니어든 기획자가 뭔가를 되게 하는 사람이라는 건 같다. 다만 시니어는 예상과 결과의 오차범위가 좁다. 기획자로 경력을 쌓는다는 건 처음에 생각한 ‘끝그림’과 실제로 완성된 일의 끌그림이 가지는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다. 즉, 시니어 기획자는 좋은 제네럴리스트다.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기획하든, 중간에 투입되어 마무리를 맡든 빠르게 맥락을 파악하며 삐걱대는 부분을 재빨리 캐치해 고칠 수 있다면 시니어 기획자라고 불릴 만 하다.

객관적인 기준이야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몇 년 이상의 경력, 몇 개 이상의 프로젝트, 몇 명의 팀원, 얼마의 예산과 기간… … . 하지만 객관적인 성취기준이 반드시 시니어리티를 보장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비교해 말하자면,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PM A와 1년 정도의 경력과 단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PM B가 있을 때 어느 쪽을 시니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그 프로젝트에서 ‘되지 않고 있던’ (not working하는) 부분을 어떻게 잡아내서 얼마나 예상을 뛰어넘는, 혹은 예상대로 훌륭한 결과물을 냈는지를 살펴본 후에 말할 수 있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의 교차로

또, 시니어 기획자는 컨텍스트 스위칭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언제나 능숙하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협업해야 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초기 세팅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이후엔 이 세팅이 고스란히 실현되도록 일종의 팀내 ‘유지보수’에 노력을 쏟는 기획자는 동시에 다양한 페이즈의 프로젝트를 살필 수밖에 없다. 갓 기획을 시작한 프로젝트 A와 결과물이 런칭 직전인 프로젝트 B, 한창 개발과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C, 마일스톤과 OKR에 엮인 장기 스코프의 프로젝트 D를 동시에 보고 고민하는 상황이 일상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수가 많을수록 시니어 기획자라고 볼 수도 있겠다. 기획자는 동시에 보는 일감의 수가 많든, 적든 맥락을 헷갈리지 않고 곧바로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들어 동료가 필요한 정보와 의사결정을 제공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기획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의견을 혼란스럽지 않게 요약하고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기획자는 커뮤니케이션의 교차로가 맞다. 기획자에 대한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기획자가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밑그림을 그려 제시한 후 이에 대한 동료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수집한 아이디어를 다시 밑그림에 반영해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기획의 본질이다.

셋째. 늦지 않는 사람

그래서 기획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꾸준할 수 있는 책임감이 요구된다. 일감의 재미없는 구석까지 샅샅이 훑을 수 있는가? 곤란하고 어려운 의사결정도 외면하지 않고 부딪힐 수 있는가? 지루하고 자잘하고 세세한 과정도 챙기면서 결과를 끝까지 낼 수 있는가? 아무리 흥미로워 보이는 프로젝트라도 진행하다보면 ‘짜치는’ 구석이 생긴다. 기획자는 그때마저도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고 꾸준히 밀어붙일 줄 알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좋은 기획자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며 늦지 않는 사람이다. PM의 관리 능력은 스스로 프로젝트를 늦추지 않고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일을 해결하고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며 회의를 주도하는 데에서부터 증명할 수 있다.

넷째. 꼼꼼한 기록자

기획자는 동시다발적으로 굴러가는 수많은 일의 진척도와 현황을 누구나 알기 쉽게, 동시에 스스로도 잊지 않고 확인할 수 있도록 어떤 형태로든 일을 기록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규모가 크고 맥락을 알아야 하는 인원이 많은 프로젝트일수록 커뮤니케이션과 의사결정이 휘발되지 않도록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정밀한 기록은 많은 인원과 의사소통할 때 이 기록이 명확한 근거가 되어주고 모두의 지침(가이드라인)이 된다. 그래서 좋은 기획자는 좋은 기록자일 수밖에 없다.

Progress maker

기획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직함은 기획 일의 본질을 단적으로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무어라 지칭하는 게 적절한지 회사마다, 조직마다 새로 고민해야 할 정도로 기획자가 하는 일은 폭이 넓으며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바뀌지 않는 것은 결국 기획자란 해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PM이라는 직함을 종종 Progress Maker로 상상하곤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되지 않고 있는 일을 되게 만들고 있는 수많은 기획자들에게 안부와 응원을 전한다. 우리는 오늘도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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